협업의 실험실로서의 도시건축통합계획
- 프랑스 그랑파리 개발 사례를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고도 성장과 양적 팽창의 도시개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단기간에 이루어진 불균형적 국토 개발은 수도권의 주택난을 심화시키고, 공간의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관한 이슈가 도시 개발에 대한 관심과 담론의 중심을 독점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낳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도시건축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기 위한 정책들이 실험되고 있다. 특히 공공건축의 질적 향상을 통해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날 실험에서 정착 단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 해 전부터는 도시와 건축 사이의 단절을 어떻게 회복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도시건축통합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답을 찾아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발견은 소중하다. 도시개발 역사에서 큰 단절을 경험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이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은 그러한 의미에서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벤치마킹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해외 사례 역시 지역 고유의 문제와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고 실험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2007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프랑스의 '그랑파리(Grand Paris)' 개발 사업은 도시-건축 간의 통합적인 협업의 측면에서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랑파리 개발 사업은 대상지의 규모나 참여 주체의 다양성 면에서 단일 사업으로 보기 어렵지만 2030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수도권 환형 전철망인 '그랑파리 익스프레스(GPE: Grand Paris Express)'의 실현을 주축으로 한다. 즉, 국내에서는 TOD(Transit Oriented Developpement)로 알려진 대중교통망 중심의 도시개발 방식이다. TOD는 광역 도시 차원의 전략과 건축-공공공간 차원의 세부 전략의 긴밀한 결합 여부가 그 성패를 좌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건축의 통합적 사고가 요구되는 대표적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기사는 GPE 사업의 구상과 실현을 위해 이례적으로 기획된 두 건의 협업 사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사례는 GPE 사업을 구상하는 계기가 된 '그랑파리 국제 연구 공모(Consultation Internationale du Grand Paris)'이고, 두 번째 사례는 GPE의 68개 역세권 공공공간 계획의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기 위한 '그랑파리 광장 연구회(Atelier des places du Grand Paris)'이다.
사업의 내용 측면에서도 나눌 이야깃거리가 많지만 본 기사에서는 협업의 장을 기획하고 실험하는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두 과업에서 어떤 주체들 간의 협업이 장려되어 사업이 시행되었고 그러한 이유는 무엇이며, 현재까지 드러난 주요 쟁점과 시사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두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 있는 파리 소재 건축도시설계사무실에서 건축가 및 도시계획가로 10년 동안 근무했으며, 2018년부터 협업을 주제로 박사 과정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기사는 필자의 실무 경험과 박사 과정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작성되었다.
그랑파리 국제 연구 공모
(Consultation Internationale du Grand Paris)
- 공모 구상의 배경과 과업 내용
그랑파리 국제 공모전(Consultation Internationale du Grand Paris)은 프랑스의 수도권 개발 전략에 있어 중앙 정부의 입지를 재확립하는 계기가 된 사업이다. 2007년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부터 이러한 구상안이 언급되었고 이듬해인 2008년 3월에 사업이 발주되었다. 이는 199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이어진 지방자치제의 보급과 정착에는 명백히 역행하는 움직임이었다. 수도권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그랑파리에 대한 논의는 2000년대 초부터 파리와 근교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2005년에는 광역도시 회의(Conférence de Métopole)가 조성되었다. 2008년에는 수도권인 일드프랑스 지역(Région Ile de France)에서 최초로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구상한 수도권 개발계획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사르코지 대통령은 국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인 수도권 발전 계획은 국가 발전 계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부합하는 야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정치적 의지와 자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그랑파리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대통령 주도로 국제 공모전의 개최 의지를 표명했다. 또한 연구 공모 발주와 동시에 사르코지 대통령은 수도권 개발 특별 정무차관(Secrétaire d'État)을 임명했다. 연구 공모에 참여한 팀에게는 그랑파리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제시를 요구했으며, 정무차관에게는 새로운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책의 제안을 각각 요구했다.
- 과업 수행을 위한 협업 팀의 구성 요건
연구 공모에는 10개의 국제 컨소시엄이 참여했다. 컨소시엄의 조건으로서 건축-도시 분야의 대학 연구기관과 기술 및 실무 전문가들을 포함하되 건축가에게 대표권을 부여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례적이었다. 첫째, 도시 차원의 전략 연구사업에서 건축가에게 대표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수도권 미래 비전의 구상 및 대국민 홍보를 위한 전시 기획이라는 과업의 성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단기간에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고 전시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휘자(chef d'orchestre)'로서의 건축가의 역량이 중요시되었다. 연구 공모를 주관한 정부 부처도 프랑스에서 건축계 일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화부였다.
둘째, 도시건축 통합 개발 전략의 수립을 위한 산학협력 팀의 구성이다. 프랑스는 공간 구성과 형태적 접근에서는 도시와 건축 계획 상에 상당한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도시설계에서 건축가의 역할이 확고한 나라이다. 하지만 건축학교가 일반대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연구와 지식 생산의 측면에서는 단절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도시 연구 주체와 건축 실무 주체 사이의 협업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며, 연구활동의 생산과 지원은 일반대학 위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건축학교 내에서 지식 생산으로서의 연구활동은 미진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된 유럽연합 고등교육과정 표준화와 함께 건축학교에서도 박사 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연구를 생산하는 구조로 변화가 유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랑파리 연구 공모는 연구자와 실무자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 성과와 비판
2008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0개월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에 협업의 기반이 다져져 있지 않은 다수의 주체들이 협심하여 수도권의 미래 비전을 열정적으로 고민하는 공론화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연구 공모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협업 방식과 제안된 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연구 공모전의 결과물들은 수도권 개발 전략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질 만한 합의점들을 도출했다. 즉, 더 이상의 도시 확산을 지양해야 하고 도시개발은 기존의 도심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기회로 이용되어야 하며, 도시와 자연의 융합을 더욱 더 공고히 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와 동시에 거주자와 시민의 눈높이에서 새로운 도시공간과 주거공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전략과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었다. 특히, 다년간의 건축학교 설계 교육과정의 주제로 탐구된 공간적 해법들이 도시 차원의 전체적인 전략을 뒷받침하는 공간적·건축적 제안의 재료로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전들을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인 수도권 환형 전철망 계획안이 전시와 동시에 발표되었다는 사실도 큰 의미와 파장을 가져왔다.
한편 수도권 환형 전철망 계획이 10개 공모 팀의 제안을 종합하고 있기는 하지만 환경부 산하의 정무차관과 문화부가 주관한 연구 공모 팀의 두 주체 간에 직접적인 협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따라서 공모전 과정에서 제기된 수많은 화두들이 순환전철 사업 뒤로 묻혀버렸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수도권 환형 전철망 개설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의지 표명은 고무적이나 해당 지방자치단체들과의 협의가 없었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연합으로 이전까지 진행해왔던 국지적 교통망 구상 사업과의 연속성과 타당성 검증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학계와 건축계 간의 협업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건축가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시각적인 자료들이 경험과 해독을 지배하게 되는 전시 형태를 최종 결과물로 기획했으며, 이는 공모전 자체를 국가 개입의 정당성 확보와 홍보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시도였다는 비판이 학계와 건축계로부터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후 연구 공모를 통해 제기된 화두들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Atelier International du Grand Paris라는 이름으로 참가 팀을 확대한 연구사업이 문화부 주관으로 진행되었으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지원이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6년 동안의 연구는 씁쓸한 결말을 내리게 되었다.
파리와 르아브르를 잇는 센느 메트로폴 조감도]
기반한 2011년 수도권 환형 전철망 계획 지도]
그랑파리 광장 연구회 (Atelier des places du Grand Paris)
그랑파리 광장 연구회는 GPE의 역세권 공공공간 계획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기 위해 2016년에 발주된 연구사업이다. 계획 지침 수립과 동시에 그동안 간과되어온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업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기획된 사업이기도 하다. 그랑파리 개발 정무차관이었던 크리스티엉 블렁의 GPE 계획안은 2010년 그랑파리법으로 공식화 되었고, 사업 수행 기관인 그랑파리회사(SGP: Société du Grand Paris)가 같은 해에 설립되었다. 창립 이후 초기 4년 동안은 지하철 사업의 기술적·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에 SGP의 노력이 집중되었지만 사업이 구체화될수록 협업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300~500m 반경에 해당하는 역세권의 공공공간 개발 및 정비 사업은 새로운 협의의 장을 기획하는 구체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 과업 목표 : 21세기 역세권 공공공간 계획 지침 수립과 정부-지방자치단체 협업 기반 마련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GPE 사업은 구상 초기부터 대통령과 중앙 정부의 독자적 진행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지하철 역의 개통은 지역의 조화로운 도시계획을 유도하고 동반할 수 있어야 하며, 도시계획의 주도권은 바로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있다. SGP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의 장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21세기를 대표할 대규모의 공공전철사업(총 200km의 전철망과 68개 역사를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건설)인 GPE가 어떻게 도시공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가도 중요한 주제였다. 그랑파리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기 이전에 파리 근교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말그대로 '파리 외곽(banlieu parisienne)'이라는 달갑지 않은 정체성에 갖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 상당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신도시 건설과 함께 실현된 원심형 수도권 고속전철(RER)로 연결되지만, 주차장과 버스정류장이 점령한 RER 역사 주변 공간은 파리 외곽의 기능적이지만 궁색한 도시공간의 이미지를 대변해 왔다. 따라서 GPE의 공공공간은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지역의 정체성과 활기를 담을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될 필요가 있었다.
- 과업 수행을 위한 협업 팀의 구성
이상의 과업 목표는 GPE 역세권 공공공간의 개발 원칙을 구상할 과업을 수행할 주체의 선정 목표와 팀의 구성 요건에 오롯이 반영되었다. 2016년 11월에 TVK 건축-도시 사무소를 대표로 하는 팀이 과업을 맡을 컨소시엄으로 선정되었다. 다양한 도시건축 통합 사업을 통해 전문 주체와의 협업 경험이 풍부한 점이 주요 선정 이유로 작용했다. TVK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그랑파리 연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전략적으로 다양한 파트너와 협업의 틀을 다져왔으며 특히 학계와의 협업을 넓혀왔다. TVK팀에는 공간계획 및 기술 전문가는 물론 지리·역사·사회학 등의 인문사회학자, 내러티브 전문가, 참여형 협의 기획 전문가 등이 포함되었으며, 핵심 멤버들은 오랜 협업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 과업 진행 상의 쟁점과 남겨진 실험
과업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에 총 3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0개월 여 만에 GPE 구상으로 이어진 초기 그랑파리 연구사업과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1단계에서는 탐색적 연구를 통해 그랑파리 영토들의 공공공간 개발에 있어 거시적인 목표와 과제 및 문제의식의 틀을 도출할 것이 요구되었다. 2단계에서는 대표성을 가지는 5개 표본 대상지에 대한 심층 연구를 통해 도출한 쟁점들을 68개 전체 역사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개발 원칙으로 변환하는 과정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도출된 개발 원칙들을 구체적인 실행 전략으로 풀어 쓰는 한편, 역사 주변 공공공간 개발 사업의 진행 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어떤 식으로 관련 주체들 간의 협의와 합의를 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 적용 방식을 구체화 하였다.
과업 초반의 주요 쟁점 중의 하나는 그랑파리를 아우르는 정체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공공공간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수개월에 걸친 인터뷰와 토론 끝에 과업 팀은 그랑파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형태와 물성 등의 표면적인 형식을 통해서 통일성을 추구하기보다는 GPE 역세권의 공공공간이 지녀야 할 공통적 자질의 도출이 강조되었다. 이 공통적 자질의 도출과 합의 과정 자체가 해당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그랑파리의 '공동의 문화(Culture commune)'을 다지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초기 과업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수차례의 협의와 공청회 및 워크숍을 거치면서 과업 팀은 연속성, 개방성, 가역성의 3대 원칙을 정의했다. 그리고 기획 방식, 도시경관, 모빌리티, 공간디자인, 재료, 공간 사용, 조경의 7개 범주에 대한 40개 세부 지침을 도출했다. 더불어 기획 과정에서의 논의와 생산물들을 다양한 형태로 집약적으로 구현한 편집 방식도 기존의 공간계획 가이드라인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사실 이 가이드라인은 공공공간 개발 및 정비 사업에 중대한 영향력을 가진다. 중앙 정부 기관인 SGP는 각 역세권 공공공간 개발 주체(지방자치단체)에 총 공사비의 30%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지급하는데, 이때 개발 주체의 가이드라인 준수가 지원금 지급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를 심사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사업 진행 내내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구체적 협의의 장으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가이드라인의 실질적 적용 과정 자체가 가이드라인 못지 않게 중요한 기획 대상이 되었다. 심사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함과 동시에 공간 기획의 창의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제적인 틀로 인식되는 체크리스트를 넘어 지침이 제기하는 질문에 어떠한 제안으로 답하고 있는지를 논의하는 장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가이드라인 평가표의 초안이 마련되어 실험되고 있다. 현재 사업 진행이 가장 앞선 역세권을 중심으로 테스트 단계에 있으며, 그 결과가 평가표 개선에 반영될 예정이다.
공간들에 대한 발상의 전환 유도]
진행 과정에서 가이드라인 반영 방식과 절차 설명]
맺는 말
협업은 문화다. 문화는 매뉴얼로 보급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자리를 잡는다. 2008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진행 중인 그랑파리 개발 계획은 규모 측면에서나 참여 주체의 다양성 측면에서 협업에 대한 대규모의 실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도시건축사업은 공간의 개발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효용에 근본적인 당위성이 있는 만큼 협업의 실험 자체를 일차적 목표로 고려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랑파리 개발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업에서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될수록, 또한 과업 자체의 목표가 클수록 협업 역시도 기획과 실험의 대상으로 적극 고려되어야 한다. 더불어 하나의 도시건축사업은 기획 주체와 참여 주체를 막론하고 주체들 간의 전략이 대립하고 또 화합하는 역동적인 협업의 장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초기의 그랑파리 개발 계획은 계획의 주도권을 해당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중앙 정부로 옮겨오기 위한 정치적 도구였던 동시에 도시건축에서 새로운 산학 협업 문화를 실험하는 장이 되었다. 이후 사업의 구체화 단계에서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의를 매개하기 위해 새로운 과업인 그랑파리 광장 연구회가 기획되었고 그동안 전략적으로 협업의 기반을 확장해온 건축가 그룹이 그 실험의 주역으로 활동한 점은 이러한 역동을 반증한다.
그랑파리 사례의 또 다른 교훈은 새로운 협업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참여 주체의 의지는 물론 주최 측의 강력한 정치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공적인 사업화를 위해서는 능력 있는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 특히, 각 참여 주체의 잠재력 발현을 독려하는 능력과 서로 다른 전문가 집단의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이미 공론화되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이 스스로 현장 경험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얻어지는 반성적 지식에 가깝다. 전문가 집단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이러한 유형의 지식을 객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한 이유이다.
도시개발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도시건축사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어떠한 주체들 간의 협업을 도모하고 있으며, 어떠한 쟁점을 남기는가 하는 것은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11월에 열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주최의 '2021 공공건축 컨퍼런스'의 주제 중 하나인 '도시를 누가 어떻게 만드나?'라는 질문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도시건축사업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진지하고 신중한 협업의 실험에 앞서 수립해야 할 질문과 가정에 대해 냉정하고도 근본적인 단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참고 문헌
Jeanne Chauvel, La question du Grand Paris(2001-2012), 정치 철학 박사 논문, 파리 2대학 Panthéon-Assas, 파리, 2015, p.476.
Guillaume Duranel, Les conventions de l'Architecture au prisme du dispositif du Grand Paris, 건축-도시학 박사 논문, 파리 라빌렛뜨 건축학교, 2019, p.548.
Société du Grand Paris, Places du Grand Paris, Principes de conception pour les espaces publics du Grand Paris Express, https://media-mediatheque.societedugrandparis.fr/pm_1_117_117718-ja409wj20d.pdf, 2021년 12월 23일 검색